귀환 동포와 친일 청산 문제 – 미완의 과제
서론
1. 귀환 동포의 귀향과 정착
1945년 8월 이후 만주·일본·사할린·중국 등지에서 대규모 귀환이 이어졌다. 이동은 급박했고 행정은 준비되지 않았다. 항만과 역에는 임시수용소가 세워졌지만 주거 공간과 위생, 교통, 의료가 모두 부족했다. 일자리는 턱없이 모자랐고, 남아 있던 산업 설비도 전시 동원과 파괴로 기능을 잃은 경우가 많았다. 귀환자는 가족과 재산을 잃고 ‘무연고 빈민’으로 전락하기 쉬웠다.
2. 주택·생계·치안의 공백
주택난은 가장 절박했다. 일본인 소유 재산의 처분 원칙이 미정이었던 탓에 빈집을 둘러싼 분쟁이 빈발했고, 판잣집과 공동수용이 일상화되었다. 배급과 시장의 이중체제가 지속되며 쌀값과 생필품 가격은 요동쳤고, 귀환자·실업자·피난민이 도시 변두리로 몰리며 치안 불안이 커졌다. 귀환 동포에 대한 사회적 낙인과 지역 갈등도 정착을 더디게 했다.
3. 친일 청산 요구의 분출
현장의 곤궁과 함께 고조된 것은 ‘정의 회복’에 대한 열망이었다. 식민지 통치의 말단까지 관여했던 경찰·관료·경제 엘리트가 해방 후에도 공직과 산업의 요직에 잔존하자, 민중은 배신감과 분노를 표출했다. 각지에서 자발적 ‘청산 위원회’가 결성되고, 학병·징용 피해자와 귀환자들은 보상과 진상규명을 요구했다. 그러나 임시 권력은 치안과 행정의 연속성을 이유로 기존 인력을 대거 재기용했고, 이는 민심과 더 깊은 간극을 만들었다.
4. 법과 제도, 그리고 좌절
해방 직후 친일 처리의 제도적 틀은 늦게 마련되었다. 반민족행위처벌법 제정으로 특별조사와 재판의 기반이 생겼고, 반민특위가 설치되어 수사와 기소가 진행되었다. 하지만 권한·예산·인력은 턱없이 부족했고, 행정부·경찰과의 충돌이 격화되었다. 정치권 분열과 냉전 구도 속 ‘반공’ 우선 논리가 힘을 얻자, 청산은 사회 불안을 키운다는 프레임이 확산되었다. 급기야 특위는 물리적 압박과 조직 와해를 겪으며 역사적 과제는 멈춰 섰다.
5. 북과 남, 엇갈린 청산의 궤적
북에서는 토지개혁과 산업 재편이 빠르게 추진되며 ‘친일 반민족’의 경제·사회적 기반을 신속히 해체했다. 남에서는 사법 절차와 재산권 문제, 정당정치의 계산이 얽혀 속도가 느렸다. 결과적으로 남한의 청산은 법제화와 일부 처벌로 제한되었고, 전범·부역 논쟁은 장기 미제로 남았다. 이 간극은 이후 남북의 정당성 서사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6. 귀환 동포와 청산의 교차점
귀환 동포 문제와 친일 청산은 서로를 비추는 거울이었다. 생활 기반을 잃은 다수의 귀환자에게 청산은 단지 ‘과거 벌주기’가 아니라 주택·토지·일자리의 재분배와 사회정의 회복을 뜻했다. 반대로 청산이 지연되자 귀환자의 분노는 사회 불만으로 축적되어 파업·시위·폭력 사건의 배경이 되었다. 복지·주거·노동 정책과 정의정책이 함께 작동하지 않으면 어떤 개혁도 지속되기 어렵다는 교훈이 여기서 도출된다.
결론 – 미완의 과제를 넘어서
해방기의 귀환과 청산은 ‘먹고 사는 문제’와 ‘정의의 문제’를 동시에 풀어야 하는 거대한 과제였다. 정착 지원의 미흡, 권력 구조의 연속성, 냉전의 조기 도래는 청산을 미완으로 남겼다. 이제 과제는 두 갈래다. 첫째, 기록과 진상 규명의 지속을 통해 역사적 책임을 명확히 하는 일. 둘째, 주거·노동·복지의 안전망을 강화해 취약한 이들이 다시 주변부로 밀려나지 않게 하는 일이다. 과거 청산은 처벌의 문제이자 사회 재구성의 문제다. 그때의 미완을 메우는 일은 오늘의 공정과 내일의 신뢰를 위한 최소한의 약속이다.
참고문헌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 해방공간과 반민족행위 문제.
-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반민법·반민특위 해설.
- 대한민국 국회 기록보존소, 반민특위 관련 의정·사료.
- 강만길, 『분단의 역사』 – 해방공간 사회·정치 지형.
- 한홍구, 『대한민국사』 – 청산과 국가 형성의 긴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