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정부 수립 과정 – 광복에서 건국으로

Ⅰ. 서론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패망으로 한국은 35년간의 식민지 생활에서 벗어나 ‘광복’을 맞이했습니다. 그러나 해방의 기쁨도 잠시, 한반도는 곧 38선을 기준으로 미·소 양국에 의해 분할 점령되었고, 독립국가 수립에 대한 열망은 새로운 정치적 도전에 직면합니다. 이 글에서는 광복 이후 미소공동위원회와 유엔의 개입, 그리고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Ⅱ. 본론
1. 해방과 분단, 미소공동위원회
1945년 광복 직후, 한반도는 38도선을 경계로 남쪽은 미국 군정, 북쪽은 소련의 통치하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이어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는 ‘신탁통치’를 포함한 임시정부 수립 방안이 논의되었고, 이에 기반한 미소공동위원회가 구성되었습니다. 하지만 미·소의 이념 경쟁과 반탁 운동의 격화로 1947년 5월까지 열린 두 차례의 공위는 결렬되고 말았습니다.
2. 유엔 이관과 단독 선거 추진
미국은 한국 문제를 유엔으로 이관하고, 1947년 11월 유엔총회는 “유엔 감시 하의 총선거 실시”를 권고했습니다. 유엔한국임시위원단(UNTCOK)은 1948년 1월 남한에 도착했지만, 소련의 북한 출입 거부로 인해 남북 동시총선은 불가능해졌고, 1948년 2월 유엔 소총회는 남한만이라도 선거를 실시하라는 결의안을 통과시켰습니다.
3. 5·10 총선거와 제헌국회 출범
좌익 세력의 반대와 일부 지도자들의 통일 노력에도 불구하고, 1948년 5월 10일 유엔 감시 하의 남한 단독 총선거가 예정대로 실시되었습니다. 이 결과로 구성된 제헌국회는 5월 31일 첫 회의를 열고, 헌법 초안 작성에 착수했습니다. 7월 17일에는 헌법을 공포하고, 7월 20일에는 이승만을 대통령, 이시영을 부통령으로 선출했습니다.
4. 대한민국 정부 수립 (8월 15일)
마침내 1948년 8월 15일, 광복 3주년을 맞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 공식 선포되었습니다. 이는 역사상 우리 민족이 자주적으로 세운 최초의 민주공화국이었습니다. 이후 12월 유엔총회는 대한민국을 “38선 이남에서 유일하고 합법적인 정부”로 승인하며 국제적 정통성도 확보하게 됩니다.
5. 정체성과 건국 논쟁
이 과정에서 ‘건국’의 기점을 어디로 볼 것인가에 대한 논쟁도 존재합니다. 일부에서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자체(1948년 8월 15일)가 건국의 완성이라는 입장을 취합니다. 반면, 3·1 운동과 임시정부 수립(1919년)을 건국의 출발점으로 보는 시각이 있으며, 두 시점을 연속적 과정으로 보는 연속론도 존재합니다.
Ⅲ. 결론
광복 이후 1948년 정부 수립까지의 과정은 모순과 도전으로 점철된 역사였습니다. 미소 냉전의 대리전, 외세의 개입, 내부의 이념갈등 속에서도 대한민국은 유엔의 인정을 바탕으로 민주공화국의 틀을 마련했습니다. 건국의 출발점을 어디로 보느냐는 논란이 있지만, 1948년 8월 15일의 정부 수립은 자주성과 합법성의 관점에서 분명한 ‘출발점’이자 중요한 역사적 성취였습니다.
Q&A
Q1: 왜 1948년 5월 10일 총선거가 중요한가요?
→ 이 선거는 대한민국 제헌국회를 구성한 최초의 민주투표였으며, 이후 헌법 제정과 정부 수립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Q2: 8월 15일이 정부 수립일인 이유는?
→ 7월 헌법 공포와 대통령 선출 등의 절차를 마치고, 공식적으로 새 정부의 수립을 국민과 국제사회에 선언한 날이기 때문입니다.
Q3: 유엔의 승인은 어떤 의미가 있나요?
→ 1948년 12월 유엔총회에서 대한민국을 “합법적인 정부”로 승인함으로써, 국제법적 정통성과 외교적 기반을 얻게 되었습니다.
참고문헌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https://contents.history.go.kr
- 위키백과, 대한민국 정부 수립, https://ko.wikipedia.org/wiki/대한민국_정부_수립
- 세계한인언론인협회, 세계 속의 한국사 – 대한민국 정부 수립 과정, https://www.worldkorean.net
- 창비학술총서, 건국과 국가정통성 논쟁, https://magazine.changb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