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년 을사늑약: 대한제국 국권 침탈과 일제강점기 서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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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빙멘토 2025. 8. 17. 20:27

일제 강점기 시작과 을사늑약(1905년) – 국권 침탈의 과정

1905년 을사늑약 체결 장면 – 고종 황제 앞에서 일본의 강압 속에 대신들이 서명하는 모습, 대한제국 국권 침탈을 상징하는 역사적 삽화

서론

1905년은 대한제국의 국권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진 해였습니다. 일본 제국은 러·일 전쟁에서의 승리를 기반으로, 미국과 영국 등 열강의 묵인 속에서 한국을 보호국화하려는 계획을 강력히 추진했습니다. 이 과정의 정점에는 1905년 11월 17일 체결된 ‘을사늑약(을사조약)’이 있었고, 이를 계기로 사실상 일제 강점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이 글에서는 을사늑약이라는 단일 사건을 넘어, 그 이전의 정치·외교적 흐름과 후속 조치, 그리고 국권 침탈 이후의 한국 사회를 한데 엮어, 당시의 치욕과 저항의 흔적을 되짚어 봅니다.

본론

1. 국권 침탈을 향한 국제적 환경

러·일 전쟁과 일본의 지배 전략
1904년부터 시작된 러·일 전쟁에서 일본은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고, 한반도에서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한 기틀을 다졌습니다.

일본의 외교적 기반 확보
일본은 1905년 7월 미국과의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통해 한국에 대한 종주권 인정을 얻고, 8월에는 영국과 제2차 영·일 동맹을 체결하며 보호국화에 대한 서구 열강의 동의를 확보했습니다. 또한, 9월 포츠머스 조약을 통해 러시아로부터 한국에 대한 영향력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았습니다.

내정 간섭과 군사 기지화
1904년 2월 체결된 한·일 의정서를 계기로 일본군은 대한제국 전역에 주둔하며 실질적인 정치 개입을 시작했고, 이후 제1차 한일협약을 통해 조선 정부 내에 일본인 고문을 대거 파견했습니다.

2. 을사늑약 체결 경위와 내용

이토 히로부미의 강요와 협박
1905년 11월 9일, 일본은 이토 히로부미를 특사로 보내 고종 황제에게 외교권 양도를 강요했습니다. 이후에도 일본은 군사적 압박을 계속하며, 조약 체결을 위한 어전회의와 대신 숙청을 연이어 강행했습니다.

을사늑약의 체결
11월 17일, 박제순, 이완용, 권중현, 이지용, 이근택 등 이른바 ‘을사오적’이라 불리는 대신들만이 조약에 찬성 서명하고, 고종의 직인도 찍히지 않은 상태에서 조약이 체결되었습니다.

주요 내용
조약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일본에 넘기고, 통감과 이사관을 파견할 권리를 일본에 부여하며, 대한제국은 국제 외교무대에서 완전히 배제되었습니다.

3. 을사늑약 이후의 국권 상실과 일제통치의 진전

통감부 설치와 내정 침탈
1906년 초대 통감으로 이토 히로부미가 부임하면서 서울에 통감부가 설치되었고, 대한제국 내정에 대한 일본의 통제는 더욱 심화되었습니다.

추가 강탈 조약 체결
1907년에 체결된 정미7조약(한일신협약)으로 일본은 한국 정부 각 부처에 일본인 차관을 배치하여 내정 운영권을 장악했고, 같은 해 대한제국 군대 해산 후 의병항쟁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습니다.

최종 병합 및 국권 완전 상실
1910년 한·일 병합 조약에 따라 대한제국은 공식적으로 일본 제국에 병합되며, 일제 강점기의 서막이 올랐습니다.

4. 민족의 저항과 계몽운동의 전개

언론과 고종의 외교적 대응
기자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 논설이 1905년 11월 발표되어 국내 여론을 환기시켰고, 고종은 헤이그 특사를 파견해 국제사회에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호소했습니다.

의병 운동의 확산
을사조약 직후부터 전국에서 항일 의병이 일어나 일본군에 맞섰으며, 정미의병으로 이어지는 등 활발한 무장 저항이 이어졌습니다.

애국계몽운동의 시작
1905년 이후, 민족 계몽과 실력양성을 목표로 한 애국계몽운동이 전개되었습니다. 사립학교 설립, 학회 및 교육 단체 활동을 통해 민족의 정신적 기반을 강화하려는 노력들이 활발했습니다.

결론

을사늑약은 단순한 외교 조약이 아니라, 대한제국의 주권을 사실상 상실한 결정적 사건이었습니다. 러·일 전쟁 승리와 열강의 묵인, 한일 협약·의정서 등 일련의 정치·외교 수순을 통해 일본은 한반도를 단계적으로 장악하며, 약소국이었던 대한제국은 주권국으로서의 자격을 상실해갔습니다. 이를 계기로 본격적인 일제 강점기가 시작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한국 민족은 항일 저항을 통해 자주성을 지키려는 노력을 이어갔습니다.

Q&A

질문 답변
Q1. 을사늑약이 왜 ‘늑약’이라 불리나요? ‘을사년(1905년) 조약’이라는 의미와 함께, 강압적으로 체결된 불평등 조약임을 강조하기 위해 ‘늑약’이라 부릅니다.
Q2. 고종 황제는 을사늑약에 어떤 반응을 보였나요? 고종은 무효임을 선언하고 이를 국제 사회에 알리기 위해 헤이그 특사를 파견했습니다.
Q3. 정미7조약이 무엇인가요? 1907년 체결된 신협약으로, 일본이 각 부처에 차관을 두고 군대를 해산시켜 내정을 완전히 장악했습니다.
Q4. 애국계몽운동은 어떤 특징이 있었나요? 무장투쟁이 아닌 교육과 문화운동을 통해 민족의 실력을 키우려는 실력양성 운동이었습니다.

참고문헌